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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국보

[국보] 대한민국 국보1호 숭례문 (남대문)

[국보] 대한민국 국보1호 숭례문 (남대문)

500년의 문화유산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일은 다시는 생기질 않기를...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1398)에 완성하였다. 이 건물은 세종 29(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숭례문의 특징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이름의 유례

인, 의, 예, 지, 신의 다섯 가지 덕을 오상이라 하였고, 서울의 사대문은 오상에 따라 이름이 저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동대문은 인에 들어가서 홍인문(홍인지문), 남대문은 예가 들어가서 숭례문입니다.

뜻을 따지자면 예는 숭상하라(숭례문)는 뜻입니다.

 


연대

1398년 - 태조 7 숭례문 준공 태종의 맏아들이던 양녕대군이 숭례문 현액을 씀.

1448년 - 세종 30년에 개축

1479년 - 성종 10년에 중수.

1907년 – 일본황태자가 방한하자 일제는 “대일본의 황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날 수 없다”면서 숭례문과 연결된 서울성곽을 헐어버렸다. 성곽을 헌 자리에 도로와 전차길을 내고, 숭례문둘레에 화강암으로 일본식 석축을 쌓았고, 앞에는 파출소와 가로등을 설치했다. 또한 이때부터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이 사건으로 현재의 모양이 확립되었다.

1916 - 고적급유물보존규칙 공표. 조선총독부에 고적조사위원회 설치

1924년 –조선총독부가 고적급유물등록대장초록을 간행. 1호 원각사지십층석탑 등 193점의 유물을 등록함. 숭례문과 홍인지문은 없었다.

1933 8 9 - 제령 제6호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 공포

1934년 – 조선보물 고적명승 천연기념물 보존령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보물 1호로 숭례문을, 보물 2호로 홍인지문을, 보물 3호에 원각사지십층석탑을, 보물 4호로 보신각종을 지정하였다.

1961 - 한국전쟁 때의 파손을 복구하기 위해 전면 해체 중수작업에 착수.

1962년 – 한국 정부는 조선총독부의 문화재 지정을 참고해서 남대문을 국보1호, 원각사지십층석탑을 국보2호, 동대문을 보물 1호, 보신각종을 보물 2호로 각각 지정하였다.

1963 - 해체 중수공사 완료.

1994년 11월 – 미술전문지 ‘가나아트’ 40호가 미술인 70명에게 여론조사한 결과 서울의 랜드마크로 국보1호 남대문이 33표로 1위로 선정되었다.

2002년 2월 – 문화재위원회는 서울시의 숭례문 근접 관광 계획을 불허했다. 불허이유는 차량으로 인해 관람객이 위험에 처할수 있고 복잡한 도로사정으로 숭례문을 차분하게 감상할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2003 - 일제가1907년에 헐어버린 서울 성곽을 숭례문 좌우로10m씩 복원했다.

2003년 9월 – 일제는 돈의문 등 조선의 왕성인 궁궐과 성곽을 항일의 상징으로 보고 철저히 파괴했으나, 임진왜란 당신 ‘가토 기요마사’가 숭례문을 자나갔으며, ‘고니시 유키나가’가 홍인지문을 지나갔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있다며 보존했으며, 2002년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오타 히데하루’ 일본 도호쿠대 특별연구원이 서울대 국사학과 기관지인 ‘한국사론’49집에 발표한 논문에서 밝혔다.

2005 5 27 - 1907년 일제에 의해 도로 속에 고립되었던 숭례문 주변에 광장을 조성·단장함.

2006 3 3 - 중앙통로를 시민들에게 개방, 일반인 출입이 가능하게 되었다.

2008 2 10 - 숭례문에 방화로 인한 화재 발생.

2008년 2월 11일 – 석축과 1층 일부만을 남겨놓고 2층 문루의 90%와 1층 문루의 10%가 타 버림



 

 

 


우리의 아픈역사는 가슴깊이 세겨야된다. 그리고 우리의 찬란한 역사는 만방에 알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픈역사는 만방에 알리고 찬란한 역사는 소멸되어가고 있는듯하다. 어떻게 국보1호를 지정하는데 일제시대에 지정한것을 그대로 지정할수가 있을까? 그러면서 민족정신을 세우네, 나라의 정체성이 있네라고 떠들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우리역사 올바르게 세우는 작업을 해야 할것이다. 그래도 숭례문은 그 가치를 국민들이 알아 관심을 가지지만 우리의 잊혀져가는 문화재들은 어찌 할것인가. 경남 함양의 농월정도 방화로 소실된지 10년이 넘은듯 하지만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것이 마음 아플뿐이다.

미래에셋생명 장수영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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