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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독서

[스크랩] 뉴라이트 교과서는 이승만 위인전인가?

내 머릿속의 이승만 대통령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민족의 단결을 외쳤던 사람, 장기집권이 불러온 4.19혁명으로 하야했던 대통령으로 배웠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면서 존재감은 없으면서 왜 대통령이 되었을까? 정도가 남아있다. 그러면서 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초대 대통령을 그리도 욕을 할까? 아무리 장기집권을 했지만 초대 대통령을 한 사람이라면 그 업적이 있을 것인데 그 누구도 그 업적에 대하여 논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그런데 요즘은 이승만 대통령을 위인으로 하려는 무리와 그 반대의 무리가 싸우는 모습이 왠지 우습게 여겨진다. 아래 스크랩한 내용은 ‘백년전쟁’ 다큐에서 잠시 보았던 내용을 열거한 것 같은데 그 내용이 길어 다 읽지는 못하고 이렇게 스크랩을 하여 찬찬히 공부하며 읽어보려고 한다. 2013년 1월 15일 현재 난 이렇게 생각한다. 난 이승만 대통령이 잘한 것은 무엇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잘 못한 것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 아무리 인재가 없었다고 하여도 친일세력청산은 반드시 했어야 한다. 그때 그걸 하지 못함으로 생긴 상처는 쉬 아물지 않을 것이다.  조국의 공산화를 막아야 되고, 좋은 인재들은 씨가 말랐지만 그때 그 시절에 하지못한것이 이렇게 어쩌면 백년전쟁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난 이승만 대통령을 존경하지 않는다. 그리고 대한민국에 살아남은 자중에 친일파 아닌 사람이 있겠는가?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은 대부분 돌아가셨을 것이고, 그 후손은 겨우 입에 풀칠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친일해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또 정권마다 기회주의자처럼 잘 살아남아서 아마 지금 대한민국의 기득권세력으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지금도 친일세력은 아닐 것이다. 아마 그 중엔 다시 나라가 위태로워진다면 독립투사로 변신할 분들도 상당이 많을 것이고, 독립투사의 후손 중에는 나라를 팔아먹으면서 기득권을 가지려고 하는 자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지금 대한민국에서 해야될일은 친일세력을 파헤치는 일보다는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을 찾아서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게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나라가 위태로워질 때 또다시 독립투사가 되게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좌우,보수진보,동서,남북으로 나라가 나뉘게 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은 분명이 달라야 하지만 그것이 나누어 지면 안 된다. 큰돌사이에 작은돌들이 촘촘히 들어가 있어야 단단한 담이 될 것이다.'

[스크랩] 뉴라이트 교과서는 이승만 위인전인가?

인권사회학자 스탠리 코언(Stanley Cohen, 1942-)은 국가를 포함한 가해자들의 '부인(否認) 논리'를 파악하고, 해부하고, 비판하고, 폭로함으로써 21세기 인권 연구와 인권 운동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학자다. 그는 어떤 것을 부인하느냐에 따라 부인의 성격을 문자적(literal) 부인, 해석적(interpretive) 부인, 함축적(implicatory) 부인으로 분류했다.

문자적 부인이란 엄연한 사실을 진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른바 새빨간 거짓말로, 관찰자의 신뢰성과 객관성, 신용도를 공격하는 부인이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문자적 부인으로 일관하다가, 이를 고수하기 어려워지면 창의력을 발휘해 해석적 부인을 덧붙인다. 해석적 부인이란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하지 않지만 그 사건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자체나 일반적 해석을 부정하지 않지만 사안의 심리적·정치적·도덕적 함의를 부정하거나 축소하면 함축적 부인에 해당한다.

코언 교수가 제시한 3단계 부인 논리를 잘 보여주는 것이 뉴라이트 교과서의 이승만 관련 서술이다. 교과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기틀을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체제로 올바로 잡는 데 동시대 어느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커다란 공훈을 세웠다."(158쪽)고 하였다. 이는 코언의 분류에 따르면, '문자적 부인' 즉 새빨간 거짓말이다(연재 (4)(5)<대한민국의 성립 당시 국가의 성격> 참조). 또한 교과서는 독립운동의역사를 항일무장투쟁이 아닌 이승만의 외교독립운동에 놓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역사적 사실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하여 이승만에게 유리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해석적 부인'이 된다. 게다가 교과서는 1920년대부터 1940년대에 이르기까지 이승만의 외교 활동을 영웅적으로 부각시키면서, 정작 민족 독립에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 외교독립운동의 한계는 무엇인지 등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설명을 회피하였다. 이는 사안의 정치적·도덕적 함의를 부정하거나 축소하는 '함축적 부인'이 된다.

1. 위인전을 방불케 하는 교과서

신생독립국가에서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일차적 세력은 누구일까? 말할 것도 없이 민족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세력이다. 지도자를 선별하는 기준이 독립운동이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자주적인 독립 국가를 수립하여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국민들의 신뢰를 얻어 사회 통합을 이루며 민주주의를 뿌리내리는 데 있어, 민족 독립에 대한 헌신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덕목이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선구회(先驅會)가 서울에 있는 정치 사회 문화단체와 학교에 물은 설문지에서 여운형이 '가장 뛰어난 지도자'로 꼽힌 이유는 그가 대중에게 '최고의 혁명가'로 인식됐기 때문이었다.

뉴라이트 교과서가 이승만을 영웅적인 독립운동가로 서술하려는 것도 해방 이후 민족지도자로서 정통성을 의식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교과서는 이승만의 뛰어난 능력과 업적을 구한말부터 해방 이후까지 본문 서술과 별도의 박스 등을 통해 여러 차례 자세히 소개하였다. 직간접적으로 이승만을 미화하는 서술이 본문과 자료 글에서 여덟 차례나 나온다. '이승만(1875-1865)'이라는 박스를 별도로 만들어 그의 일생을 소개하였으며, 곳곳에서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영웅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사진과 삽화에서도 이승만이 7회로 박정희(11회) 다음으로 많이 나온다. 이쯤 되면 교과서라기보다 위인전이라 이름 붙이는 것이 사실에 더 가까울는지 모르겠다.

이승만 우상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8년,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의 83회 생일을 경축하기 위해 '이승만 찬가'를 지어 전국에 배포하였다.

우리나라 대한나라 독립을 위해
여든 평생 한결같이 몸바쳐오신
고마우신 리 대통령 우리 대통령
그 이름 길이길이 빛나오리라
(……)

뉴라이트 교과서 역시 이승만을 '대한독립을 위해 한결같이 몸 바쳐 오신' 영웅적인 독립운동가로 묘사하고 있다. 자유당 정권 아래의 이승만 우상화 작업에 비해 손색이 없을 정도다. 교과서는 이승만을 위대한 독립운동가로 미화하는 과정에서 세 가지 편향성을 드러냈다.

첫째, 독립운동사를 이승만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교과서는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10년마다 이승만의 외교활동을 비중 있게 다루어, 마치 이승만이 일제강점기 내내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한 것인 양 서술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미주 망명 시절 친일적인 언행을 적지 않게 했다. 이승만이 하와이로 귀환한 다음날인 1922년 9월 8일 발표한 성명서도 그중 하나이다.

"한국은 종래처럼 평화로운 수단에 의해 일본의 견제와 속박[覊絆]을 벗어나 독립하려는 것으로, 이런 평화수단이 실패되고 달리 취할 좋은 방법이 없는 경우에는 일본과 전쟁을 할 것이다. 전쟁은 실로 독립을 얻기 위해 최후의 수단인 것이다. (…) 한국의 상태는 일본의 신 총독의 치하에서 현저히 그 면목을 일신했다. (…) 신 총독은 개혁을 실시했는데, 그 개혁은 한국인에 의해 승인되고 있었다. 나 개인의 의견으로서는, 일본의 한국 점령은 일본에게 큰 부담이 되므로, 일본은 점차 한국에서 철병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국은 자연히 그 독립을 회복할 수 있게 될 것이며, 그때는 사실상 현재 다만 지상(紙上)에만 존재하는 임시정부를 현실적으로 건설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9-<임시정부사자료집>, 1975)

이승만이 1925년에 상해임시정부로부터 대통령직에서 탄핵·면직됐으므로, 위 발언을 할 당시 이승만의 지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이었다. 3.1운동에서 분출된 민족의 독립의지를 결집하여 출범한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독립 혈전이 아닌 평화적 수단에 의한 독립을 언명했으며 적대국인 일본의 식민통치를 찬양했다.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은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발언했다. 이는 임시정부의 존립 근거를 부정하는 것이자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로서 자격과 지위를 스스로 허무는 것이다. 그의 성명서에 대한 일본 총독부 경무국의 평가가 이를 잘 말해준다

"이제 사리에 어둡고 깨닫지 못하는[頑迷不靈] 그의 뇌리에도 분명히 우리 [일본] 총독 통치가 얼마나 훌륭하고 아름다우며[善美] 일본제국이 다액의 국고[國帑]를 투입하여 한국의 근래에 귀순하는[新附] 백성을 배양하고 있는가를 깨달은 것으로 인정된다."

이승만이 일본을 적대하기 시작한 것은 이로부터 20년가량 지난 1939년 워싱턴으로 건너가면서부터였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미국과 일본이 적대적인 관계로 들어섰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을 바꾼 것이다.

둘째, 뉴라이트 교과서는 이승만 외교 독립운동의 오류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쳤으며 대한민국을 건국한 '국부(國父)'이므로, 독립운동에 오류가 없으며, 있을 수도 없고 또 있어서도 안 된다는 입장이다. 일제강점기 이승만의 가장 큰 오점은 즉각적인 독립보다는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임시정부는 내부 분란에 휩싸였다. 이에 대해 신채호는 "이승만은 이완용·송병준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 전에 팔아먹었다"며 격분했다. 그러나 교과서는 이승만이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했다는 사실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셋째, 이승만의 탄핵·면직이나 임시정부 승인 외교 실패 등의 책임을 주변 탓으로 돌리고 있다. 이승만은 1925년 임시정부 대통령에서 탄핵·면직되었다. 이에 대해 교과서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으로 추대되었으나, 1925년 고려공산당 당원과 반(反) 이승만 세력이 우세했던 임시의정원에 의해 탄핵, 면직되었다."(59쪽)라고 서술했다. 탄핵·면직을 공산주의 세력과 벌인 갈등 탓으로 돌린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이 탄핵·면직된 이유는 대통령으로서 직무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에 선임되었으나 임지에 부임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외교독립론을 내세워 대부분의 시기를 미국에 거주하면서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대통령으로 행세하며 서방 지도층 면담 등 외교 활동에 주력하였다. 특히 당시 임시정부는 재정 악화로 고전하고 있었는데, 이승만은 징수하는 자금의 대부분을 자신의 외교 활동비로 충당하였다. 이처럼 이승만은 미주에 머물면서 임정을 돌보지 않았고, 미주동포들로부터 거두는 세금을 임정에 보내지 않고 임의로 사용하였기에 임시의정원으로부터 탄핵·면직된 것이다

2. 이승만 중심의 독립운동사 서술

1) 1920년대 구미에서 전개한 독립운동

교과서는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10년 단위로 이승만의 외교 활동을 주요하게 다루었는데, 각각의 내용을 시기별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1920년대는 '임시정부의 외교활동과 구미에서의 독립운동'이라는 항목을 설정하여 이승만이 구미에서 전개한 독립운동을 다루었는데(119쪽), 서술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임시정부의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 워싱턴에 구미위원부(The Korean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를 설치하고 서재필, 김규식 등과 더불어 임시정부의 외교와 홍보를 주도하였다.
② 구미위원부는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선전하는 『한국평론』이라는 영문 잡지를 출판하고, 한국친우회의 창립을 후원하고, 한국인의 독립투쟁을 널리 소개하는 저서를 출간하였다.
③ 1921년 11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강의 해군 군사력 감축을 논의하는 군축회의가 열리자 임시정부는 이승만, 서재필, 정한경 등으로 구성된 대표단을 보냈다.
④ 대표단은 동양평화와 세계평화에서 한국 독립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독립청원서를 배포하였다.

①, ②는 구미위원부의 활동이고 ③, ④는 워싱턴군축회의 참석에 관한 내용이다. 먼저 구미위원부의 활동부터 알아보자. 교과서는 구미위원부가 임시정부의 외교와 홍보를 주도하였으며(①), 한국인의 독립투쟁을 널리 소개하는 저서를 출간하였다(②)고 하여 구미위원부가 마치 독립운동을 위해 설립된 공공기관인양 서술하였다.

그러나 구미위원부는 이승만의 개인 사설 기관이었다. 임정은 "구미위원부는 원래 이승만 대통령이 단독으로 설립하고 거기다 구미에 대한 오인의 외교와 선전기관이라 하여 멋대로 성명(聲名: 평판, 필자)한 것이며 결코 국무회의의 결의 또는 의정원의 동의를 거쳐 적법으로 설립된 것이 아니다"라고 판단한 바 있다.

이승만이 구미위원부를 조직한 근본적인 이유는 독립운동보다는 미주 한인 사회의 재정 관할권을 장악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재정 수합이 가장 큰 활동 목적이었던 구미위원부는 임시정부 산하의 기관이었음에도 예산안 집행에 대해 감독이나 사후 승인을 받지 않았다. 임정이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면직하면서 구미위원부 폐지령을 공포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즉, 구미위원부가 국무회의의 결의나 임시의정원의 동의 절차를 거지지 않은 불법적 기관으로서 이승만의 독단에 의하여 설치되었으며, 실제 독립운동은 하등의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임시정부의 업무 수행만 방해한다는 이유에서였다. 1925년 3월 10일 임정이 구미위원부 폐지를 의결하면서 거론한 부정·비리는 다음 세 가지였다.

첫째, 하와이의 동포들이 공동 결의로서 임시정부에 직접 납입하려고 한 인구세금을 중간에서 가로채 유용하고, 정부에서 임명한 세금 징수 사무를 맡아서 처리하는 징세위원을 불법으로 처벌하였다.
둘째, 대통령에 위임 발행한 외국공채수입도 거의 전부 유용하고 심지어는 수지보고조차도 하지 않았다.
셋째, 본래의 임무인 외교와 선전에 관해서도 하등의 볼 만한 성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일편의 보고도 하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구미위원부가 '연방정부'와 같은 행세를 하면서 독립운동의 통일을 파괴하고 인심을 분열시켰기에 국무회의에서 내정 통일과 외교 쇄신을 기하기 위하여 구미위원부의 폐지를 결정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그리고 구미위원부의 제반 사무와 미주 본토의 재정 징수 업무를 미주 국민회에 위임했다.

다음 이승만의 워싱턴군축회의 참여에 대해 알아보자. 1921-1922년간 워싱턴군축회의 참여는 미·일 개전설에 희망을 걸고 이승만과 구미위원부가 전력을 기울였던 최대의 외교사업이었다. 이승만은 아시아에 평화가 유지되려면 우선 한국이 독립해야 하고 하나의 완충지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자신의 지론을 워싱턴군축회의에 제기하고자 그는 개인적으로 각국 대표들에게 면회를 요청하기도 하고 신문기자와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문제는 회의의 의제로 제출되지 않았다. 한국 문제의 상정, 혹은 한국 대표의 출석·발언권 신청이 모두 묵살당하였다. 이승만은 자기가 한국임시정부의 정식 대표라는 것을 주장했으나 그를 상대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승만의 입장에서 독립운동사를 서술한 교과서조차 "열강의 대표들은 임시정부 대표단의 호소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119쪽)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것처럼, 이 회의에서 이승만의 외교활동은 형편없이 실패하고 말았다. 워싱턴군축회의에 대한 청원외교의 실패를 마지막으로 이승만의 외교독립노선은 존립 기반을 상실했다.

이상 이승만이 구미에서 전개한 독립운동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이 시기 해외 독립운동의 중심은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이나 이승만이 구미에서 한 독립운동이 아니라 만주에서 벌인 독립전쟁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교과서도 '만주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이라는 항목을 설정하여 만주의 독립전쟁을 다루기는 하였다. 그러나 교과서는 전과(戰果)만 언급하였을 뿐 그것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였다. 심지어 독립전쟁과 외교 활동은 차원이 다른 독립운동인데도 양자를 동격에 놓고 같은 비중으로 서술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다.

1920년대 만주에서 전개된 항일무장투쟁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3·1운동 직후 국외에 건설된 독립전쟁기지를 기반으로 국경지대와 만주지역에서 독립전쟁이 벌어진다. 1919년 하반기부터 만주·연해주지역에서 독립군 부대들은 국내 진공작전을 시도하는데, 이는 앞선 시기 의병전쟁의 맥을 잇는 활동이었다. 1920년 6월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은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군, 안무의 국민회독립군과 연합하여 봉오동을 기습해 일본군 대대 병력을 포위, 공격하여 대승리를 거두었다.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의 본격적인 첫 전투였으며, 독립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봉오동 전투에서 패전한 일본군은 '훈춘사건'을 날조하고 불법적으로 국경을 넘어 1만5000명의 대군으로 독립군의 집결지인 청산리 일대를 공격했다. 청산리 전투에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독립군 등 여러 독립군의 연합 부대는 일본군 1200명을 대파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1920.10). 청산리전투는 3·1운동 후의 독립전쟁 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

청산리 전투 이후 민족해방운동 단체들이 통합되면서 만주 지방의 교포 사회를 3분하여 통치한 사실상의 정부인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가 성립하였다. 3·1운동 이전의 각 독립전쟁기지를 한층 더 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상해임시정부가 인민과 영토가 없는 정부였음에 반해 이들 3부야말로 어떤 의미에서는 주권 인민 영토, 그리고 군사력까지 갖춘 실질적인 공화주의 자치정부였다고 할 수 있다.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성립으로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이룩된 공화주의정부가 이들 독립전쟁기지에서 실재했던 것이다(강만길, 66-73쪽).

2) 1930년대 만주사변과 이승만의 외교 활동

1931년 9월 18일 일제는 류탸오거우(柳條溝)에서 스스로 만주철도 선로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 측 소행으로 몰아 만주 침략을 감행하였다. 만주사변이 발발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교과서는 '만주사변과 이승만의 외교 활동'이라는 항목을 설정하여, 만주사변의 역사적 의미를 이승만의 외교 활동이라는 관점에서 서술하였다. 그리고 이승만이 1933년 <만주의 한국인>이라는 책을 서술하여 국제연맹에 제출하였다는 점을 크게 부각시키고, 이승만이 "국제연맹 회원국이 한국 문제, 특히 만주에 사는 한국인의 권익 문제를 심의해 달라고 요청하였다"(127쪽)고 하였다. 그러나 정작 이승만이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이승만의 국제연맹 외교 실상은 다음과 같다. 만주사변 발발 이후, 국제연맹은 리튼 조사단을 통해 만주 실정을 조사하고 제네바에서 국제연맹 회의를 개최했다. 그러자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국제연맹에 한국 독립을 탄원할 전권대사로 임명하였다. 이승만은 이 회의에서 한국 독립 문제를 호소하기 위해 1932년 12월 23일 제네바로 떠났으며, 국제연맹 임무가 종결된 후인 1933년 12월 30일 국무위원직에서 만기 해임되었다. 이승만은 1934년 초 다시 임정의 주미외무행서(駐美外務行署)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나, 1936년 7월 8일 국무회의는 주미외무행서 외무위원 이승만을 해임시켰다. 이승만의 해임은 그가 임시정부 외무행서위원으로 있던 1934-1936년간 미주 지역에서 별다른 외교의 기회와 방법이 없다는 점과 관련이 있었다(정병준, 207-209쪽).

만주사변의 역사적 의미는, 워싱턴군축회의 외교 실패 이후 침묵했던 이승만의 외교 활동 재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이 확대·발전하였다는 데 있다.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면서 만주는 동아시아 민중과 일본제국주의가 격돌하는 최전선이자, 무장투쟁의 중심 근거지가 되었다. 1931년에서 1936년까지 항일무장대 출몰 회수는 2만3928회, 전투에 참여한 연인원은 136만9027명이었다. 일제의 집요한 토벌에 맞서 항일유격대는 통일전선 방침을 채택하였다. 이들은 조선인과 중국인,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막론하고 반일세력은 모두 받아들인다는 원칙에 따라 동북인민혁명군을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36년 초에 이르러 동북인민혁명군은 광범위한 통일전선적 무장력인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확대 발전하였다.

동북항일연군은 한국광복군, 조선의용군과 더불어 조선인 3대 무장 세력이었다. 동북항일연군은 만주국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 전투 및 선전활동에 주력하였으며, 국내 진공작전을 펼쳐 평안북도 일대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전개하였다. 예컨대 동북항일연군의 모체인 동북인민혁명군의 참모장 이홍광(李紅光:1910∼1935)은 1935년 2월 13일 새벽 2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일제의 만주 침략에서 군사적 요충지의 하나였던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을 기습하여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이 전투는 1930년대 만주 항일무장투쟁 세력 최초의 대규모 국내 진입 작전이었다. 만주국과 관동군이 간도특설대 본부를 백두산자락 바로 밑에 있었던 안도현 명월구에 둔 까닭은 그곳이 동북항일연군 유격 활동의 근거지였기 때문이었다.

간도특설대는 관동군이 필요로 하는 각지의 최전선을 이동하며 독립운동가를 색출하거나 항일무장단체를 탄압하였다. 중국 측 조사에 따르면, 간도특설대는 1939년 4월 안도현 십기가촌(十騎街村)에서 동북항일연군을 공격하는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후 간도특설대는 동북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을 공격하는 데만 전념했는데, 특히 안도현 일대의 유격대, 주로 조선인 대원들이 많았던 제1, 2군을 상대했다. 간도특설대는 일제의 패망으로 해산할 때까지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에 대해 모두 108차례 토공(討攻) 작전을 벌였다.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 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했다. 그밖에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강간·약탈·고문을 당했다.

만주사변을 계기로 만주 전역에서 조선인 항일유격투쟁이 본격화되어 무려 10년 이상 전개되었다. 만주사변이 우리 역사에서 지니는 의미는 여기에 있다. 이 때문에 일제는 조선인으로 구성된 간도협조회나 간도특설대와 같은 '전문 토벌대'를 조직해 조선인 항일무장투쟁 세력을 분쇄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만주사변의 역사적 의미를 교과서는 이승만의 외교 활동으로 대체하였다. 이승만 중심의 편향적인 독립운동사 인식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3) 1940년대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이승만의 외교 활동

이승만의 마지막 대미 외교는 태평양전쟁기인 1942-1945년에 시도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교과서는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미주에서의 외교활동'이라는 항목을 두고,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하였다. 임시정부는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를 워싱턴에 설치하기로 하고, 이승만을 위원장에 임명하였다"고 하였다. 교과서는 또한 "이승만을 후원하는 한미협회(韓美協會)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1942년 3·1절을 기하여 워싱턴에서 한인자유대회를 개최하고 미 국무성에 한국을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할 것과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였다."고 기술하였다(131쪽). 태평양전쟁기에 이승만이 임시정부 산하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자격으로 임정승인 활동을 활발히 벌였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주미외교위원부의 주된 활동 목표는 미국에서 임정 승인 외교였지만 사실상 이승만의 대미 외교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임정은 이승만의 외교를 통해 미국의 우호적 태도를 기대했다. 그렇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이승만은 임정 승인 외교를 표방했지만, 오히려 임정의 진로에 부정적인 역할을 했다. 대한 정책을 입안 결정하는 미국 국무부는 임정과 이승만에 대해 더 확고히 부정적으로 인식하였으며, 중국과 소련 정부 역시 부정적 인식을 갖게 되었다. 임정과 한인 단체에 대한 국무부의 부정적 인식은 해방 전후 미국의 대한 정책이 신탁통치로 결정되는 데도 일정한 작용을 했다(정병준, 221-267쪽).

미국은 끝내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은 명분으로 임정의 대표성 문제와 한인단체의 분열상을 들었다. 하지만 임정은 좌우연합으로 대표성이 강화되었다.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본제국주의의 패망이 가까워지자, 민족해방운동전선의 정치력과 군사력을 통일시켜야 할 필요성이 더욱 높아져갔다. 따라서 중국 관내지역 민족해방운동전선의 통일전선운동은 계속되었다. 그 결과 중국 공산군 지역으로 옮겨가고 남은 조선의용대원이 임시정부 군사력인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군사력의 통일을 이루었다. 정치 부분의 통일도 진전되어, 마침내 임시정부를 통일전선정부로 확대 강화시킬 수 있었다(1944.4). 반면 태평양전쟁을 통일된 연합조직으로 맞이했던 재미 한인들은 전쟁이 종국적으로 치닫는 와중에서 분열되었다. 이러한 갈등과 분열은 한인독립운동과 임시정부가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는 데 장애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분열의 원인은 여러 가지이지만, 이승만의 독선적인 태도와 자금·조직을 장악하려는 시도에 기인한 바가 컸다.

"중경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 정부의 불신에는 이승만이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1932년 제네바 행을 제외하고는 1920년대 중반 이래 거의 활동을 중지하였던 이승만은 중일전쟁 이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여 1940년대에 들어와서는 '외교 활동'을 재개하였다. (…) 1943년 여름 태평양협의회의 한 모임에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송자문 중국 외교부장에게 한국인들의 저항 운동을 평가해줄 것을 요구했다. 송자문은 이승만에게 한길수와 제휴하도록 설득했으나 헛수고였고, 그래서 송자문은 한국인들이 너무 분열되어 있기 때문에 지원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루스벨트에게 성급히 보고하였는데, 이것이 임시정부 승인 또는 지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서중석, 181~182쪽)

이상 뉴라이트 교과서는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의 항일 민족독립운동을 서술하면서 이승만의 외교 활동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선전 활동에 주력한 이승만의 외교 운동을 최전선에서 독립 혈전을 감행한 무장투쟁과 동격에 놓고 서술하였다. 1920년대 봉오동·청산리 전투를 이승만의 구미위원부와, 1930년대 동북항일연군의 유격대 투쟁을 이승만의 국제연맹 외교와, 1940년대 충칭임시정부의 광복군의 창설을 이승만의 주미외교위원부 설치와 같은 비중으로 다룬 것이다. 가히 '이승만의, 이승만에 의한, 이승만을 위한' 독립운동사 서술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독립운동가'라고 이름 붙이기조차 민망한 인물이다. 이승만은 독립전쟁 자체를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더 큰 문제는 이승만이 독립전쟁을 위한 준비 자체를 방기했다는 점이다. 이승만이 일차적으로 중시한 것은 독립운동자의 항일 의지·역량 집중 등 항일운동의 의식·조직적 성장이 아니라 미국 등 세계 여론의 향배와 지지여부였다(정병준, 120-123쪽).

실제로 이승만은 워싱턴군축회의 외교 실패 이후 1939년까지 거의 20년 동안 적극적인 항일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1922년 9월 하와이 귀환 기자회견에서 "평화적 수단이 다하였을 때 비로소 독립전쟁을 해야 하는데, 그 전쟁은 1년 후가 될지, 또는 10년 후가 될지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대일전은 불가능하여 새로운 총독이 많은 개혁을 단행해 한국인들의 성원을 얻고 있다"며 적국 일본의 식민통치를 찬양하였다.

게다가 이승만은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의열투쟁을 "어리석은 짓들"이라고 조소했다. 이봉창이나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한국의 독립에 하등의 도움도 되지 않을 뿐더러, 일본이 한국을 탄압하는 구실밖에 주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판단과는 달리,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특히 한국의 독립운동에 냉담하던 중국인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청년이 해냈다"며 감격했고, 종래 무관심하던 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육군중앙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성원하였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한동안 침체일로에 빠져있던 독립운동이 활기를 되찾았으며 임시정부는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로 볼 때, 교과서가 이승만을 영웅적인 독립운동가로 미화하기 위해 그의 외교활동을 과다 서술하고 과대평가하였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3. 이승만 외교독립론의 문제점

교과서는 이승만이 "장기간의 미국 망명생활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국제연맹과 미국정부에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였다."(59쪽)고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임정 승인 외교는 오히려 임정의 진로에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이승만 외교독립운동 방략이 지니는 문제점 때문이었다.

이승만 외교독립론의 첫 번째 문제점은 그 기본이 민족의 자력에 의한 독립 쟁취가 아니라 외부 정세와 국제질서에 의존하여 강대국에 독립을 청원하는 외세 의존적 독립운동이라는 점이다. 이에 대해 단재는 <조선혁명선언>에서 통렬히 비판하였다.

"일본이(…) 조선에 대하여 강도적 침략주의를 관철하려 하는데, 우리 조선의(…) 이들은 한 자루의 칼과 한 방의 총알도(…) 던지지 못하고, 청원서나 여러 나라 공관에 던지며 탄원서나 일본 정부에 보내어 국세의 외롭고 약함을 슬피 호소하여 국가존망·민족사활의 대 문제를 외국인 심지어 적국인의 처분으로 결정하기만 기다리었도다."

이승만은 한민족이 자력으로 독립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니고 있다는 데 회의적이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이다. 1918년 11월 독일이 항복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이듬해 1월 18일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 미주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평화회의에 이승만과 민찬호, 정한경 등을 파견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은 미국 시민이 아니므로 여권을 얻을 수 없었다. 이들은 일본 국민인 까닭에 마땅히 일본대사관에서 여권을 받아야 한다는 게 국무부의 해명이었다. 이들은 하는 수 없어 대안으로 윌슨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보내 한국의 지지를 끌어내려고 했다.

"평화회의에 모인 연합군 측이 장차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하는 조건하에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두고 현 일본의 통치하에서 해방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저희들의 자유원망을 평화회의의 탁상에서 지지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청원하는 바입니다."

이것이 유명한 '위임통치안' 문서의 한 구절이다. 한국이 일본의 속박에서 벗어날 때까지 국제연맹 위임통치 아래에 두어 보호를 받게 해달라는 요청이다. 이승만과 정한경은 이 청원서에 서명해서 2월 25일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이들이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유는 한국의 즉시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애초부터 한국의 즉시 독립이나 자력독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으며, 미국의 후견 하에서 한국의 독립을 달성하려고 하였다.

3월 16일 이승만은 미국의 윌슨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했던 위임통치 청원서를 언론에 공개했다. 이 즈음이면 국내의 3.1운동 소식이 미국 언론에도 본격적으로 보도되기 시작할 시점이다. 이승만은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선언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워싱턴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승만은 '한국위임통치청원서'를 각 신문사에 돌려 기사화하게 했고 일제의 가혹행위를 미국과 영국이 막아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위임통치 청원에 대한 비난과 질책이 쏟아지자, 이승만은 3.1운동 이전에 있었던 일이며,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담보로 '몇 해 동안만' 국제연맹의 관할을 받기로 한 만큼 사실상 독립 요구와 같은 것이라고 변명했다.

위임통치 청원이 독립 요구와 같은 것이라는 이승만의 주장은 실제와는 다르다. 파리강화회의는 패전국의 식민지를 분할하면서 열강 간의 대립을 조정하고 식민지 약소민족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완충장치로서 위임통치 제도를 고안해 냈다. 하지만 위임통치는 사실상 식민지 지배를 받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위임통치 청원이 3.1운동 이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변명도 사실과 다르다.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한 청원서의 작성일자는 2월 25일이지만, 그것이 미국 정부에 전달된 것은 3월 3일 경이었다. 3월 20일자 <뉴욕타임스>에 '한국은 자치능력이 없고 일본의 통치가 마땅하다'는 소퍼 선교사의 기고문이 실렸다. 정한경은 그 다음 날짜 반박문 '한국의 호소'라는 글에서 "한국의 모든 계층의 인민들은 한마음으로 파리강화회의에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호소"하고 있다며, 일본은 한국에 자치권을 허용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한경은 <아세아>(Asia)라는 잡지 5월호에 '오늘의 한국'이라는 글을 실으면서 버젓이 위임통치 청원서를 첨부했다.

이승만과 정한경은 한국민의 저항과 독립의지만으로는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았다. 중요한 것은 서구 열강, 특히 미국의 관심과 지원이었다. 그들이 위임통치 청원서를 공개했던 것도 미국 정부뿐만 아니라 일반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었다. 요컨대 한국민이 자력에 의한 독립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위임통치 청원의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고정휴, 323-4).

이승만의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은 "우리는 여기에 우리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라고 한 3.1독립선언문의 독립정신을 스스로 부정하는 망언이었다. 이 때문에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며 사학자인 신채호는 이승만의 임시정부 대통령 선임을 반대하였다. 특히 3.1독립정신을 부정한 이승만이 3.1운동의 열기를 모아 출범한 상해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되었으며, 단 한 번도 위임통치 문제에 대해 공개적인 사과나 철회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가 됐다. 이승만은 상해로 건너온 후 1921년 1월 5일 제1차 국무회의에 참석했다. 국무회의는 위임통치 청원과 자치론에 대한 논란 끝에 "위임통치 청원의 동기가 독립을 부인하려던 고의가 아니고, 지금 국제 정세에 현혹이 없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일반 동포의 의혹을 풀게 하자"라고 의결했으나 이승만은 성명서 발표를 거부했다(정병준, 160쪽). 대통령을 비난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며, 위임통치 건은 지나간 일이므로 철회할 의사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위임통치 문제를 둘러싼 상해 임정 내부의 논란에서도 전혀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이는 임정 분열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이승만 외교 독립운동의 두 번째 문제점은 친미 일변도 외교활동이었다는 점이다. 이승만의 외교 독립운동은 철두철미 미국의 힘을 빌리자는 것이었다. 이승만의 외교 노선과 활동은 미국을 사고의 중심에 놓고, 미국을 대상으로, 미국식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승만의 한반도 중립화론은 여타의 무장투쟁론·독립전쟁론과 결합되거나 상보적 관계에 놓인 것이 아니라 사실상 주체적 독립운동부정론이나 외세 의존적 허무주의에 가까웠다(정병준, 702).

1925년 <독립신문>에는 이승만의 외교의 실패에 대해 논하는 글이 실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원래 외교라는 것은 외국과 교섭하여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이런 목적에 비추어 볼 때 우리와 같은 처지에 놓인 중국과 약소민족, 그리고 침략적 자본주의 및 제국주의를 적으로 하는 소련과 제3국제당[코민테른]이 일차적인 외교 대상이 되었어야 마땅하다. 태평양 상의 이해와 중국 대륙의 이권을 놓고 일본과 다투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 열강도 있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제2위에 속한다. 그런데 이승만은 소련은 적색이라 위험하니 불가근이고, 중국 등은 약자라 무세(無勢)하니 불가교라 하여 오직 백색유세(白色有勢)한 미국만을 하늘 같이 신뢰했다. 그러나 미국이 우리 민족운동에 대하여 하등의 원조를 주었다는 것을 아직 문견(聞見)치 못했다."(<독립신문> 1925.3.31, 고정휴, 247쪽에서 재인용)

이승만은 한국과 미국의 이해관계를 일치시킴으로써 한국 문제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환기시키려고 했다. 이승만에게 '친미' 외교노선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이 독립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가 임시정부 소재지인 상해가 아니라 워싱턴에서 활동하기를 고집했던 것도 이러한 신념 때문이었다(고정휴, 217).

이승만 외교 독립운동의 세 번째 문제점은 연합국인 소련을 적대시하는 반소·반공 외교로 인해 임정 승인에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이다. 이승만은 임정 승인 외교를 표방했지만, 오히려 임정의 진로에 부정적인 역할을 초래했다. 미국 국무부뿐 아니라 중국과 소련 정부 역시 임정과 이승만을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임정과 한인 단체에 대한 강대국의 부정적 인식은 해방 전후 미국의 대한 정책이 신탁통치로 결정되는 데도 일정한 작용을 했다. 또한 임정은 이승만의 외교를 통해 미국의 우호적 태도를 기대했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정병준, 267).

우리 민족이 줄기찬 대일항전을 하였음에도 국제법상의 승인을 얻지 못해 입은 피해는 엄청났다. 연합국이 승인하면 임정은 국제법상의 권리의 주체이지만, 승인이 없는 한은 통치체제 즉 일본 국내법 테두리 안에서의 반란으로 국제적 간섭의 대상에서 제척(除斥)된다. 뿐만 아니라 임정이 국제적 승인만 얻었다면 망명정부로서의 요식을 갖춘 대일 선전포고로써 우리는 전승국의 일원도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승인을 결여했기 때문에 우리의 독립운동은 국제적으로 하등의 발언권을 얻지 못했고, 한반도는 일본 영토의 일부로서 연합국의 점령대상이 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임정은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고 말았다. 이들이 망명정부로서 입국만 했던들 민족세력의 구심점으로서 통일정부로까지도 성장했을지 모른다(임종국, 157쪽).

4. 이승만의 대통령 '자임'과 탄핵·면직

교과서는 이승만이 "3·1운동 후 한성임시정부의 집정관총재로 추대되었다. 뒤이어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으로 추대되었으나, 1925년 고려공산당 당원과 반(反) 이승만 세력이 우세했던 임시의정원에 의해 탄핵, 면직되었다."(59쪽)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대통령 경력은 떳떳한 것이 못 되었다. 이승만은 대통령으로 '추대'된 것이 아니라 '자임'한 나머지 상해 임정에서 대통령으로 선임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퇴임도 당당했던 것이 아니다. 이승만은 고려공산당과 빚은 갈등 때문이 아니라 직무 방기와 위임 통치 청원 때문에 탄핵으로 쫓겨났다.

1) 이승만의 대통령 '자임'

3.1운동의 열기를 모아 상해에 모인 인사들은 임시의정원을 조직하고 4월 13일 정부의 수립을 선포했다. 이승만은 이 초기 상해 임정의 국무경(國務卿: 국무총리)으로 선임되었다. 상해 임정은 원래 대통령직을 두지 않기로 하고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선출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종결로 식민지 구도에 변화가 일어나던 당시에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외교적 승인을 통한 독립의 길에 기대가 컸다. 이 때문에 외교통, 특히 미국통인 이승만이 중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채호는 위임통치 청원 이력을 이유로 이승만의 국무총리 선출에 반대했다. 그런데 국무총리로 선출된 이승만이 임의로 대통령 행세를 하였기에, 상해임정은 하는 수 없이 임시헌법을 개정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 과정을 정병준 교수가 자세히 추적하여 밝혔다(정병준, 161-196쪽).

"이승만이 대한공화국 임시정부 국무경의 직함을 버리고 처음으로 대통령(president)으로 자임한 것은 1919년 6월 14일부터였다. 이승만은 대통령 명의로 구한국과 조약을 맺었던 열강들에게 한성정부(The Republic of Korea)의 탄생을 알리는 공식 서한을 보냈다. 당시 상해에 있던 안창호는 이승만의 대통령 자임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곧바로 국민회에 전문을 보내 (상해) '대한공화국 임시정부'가 아직 대통령을 선정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통령이란 명칭을 밀고 나갈 결심을 분명히 했다. 이승만은 일단 한성정부 관련 문서들을 입수하자, 대통령 명의로 외교문서들을 발행하고, 파리강화회의의 김규식에게 신임장을 보내는 등, 대외적으로 대통령 선포 작업을 했다."

상하이임시정부가 대통령 호칭은 헌법에도 없는 참칭이라며 강하게 만류했음에도 이승만은 계속 대통령 직함으로 행세하면서 오히려 임시정부를 대통령 직제로 개편할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상해에서는 노령-한성-상해 3정부의 통합 논의가 깊숙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마지막 남은 문제는 이승만의 대통령 자임 문제였다. 논쟁 결과 상해 임시정부는 9월 11일 국내에서 수립된 한성정부의 법통을 따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고, 나머지 각료는 한성정부 각료 명단 그대로를 인정하는 개편을 통해 노령-한성-상해 3정부의 통합을 이루었다. 임시정부는 통합정부로 출범하면서 개헌절차를 거쳐 직제를 바꾸었으며, 위인설관의 직제 개편에 따라 이승만은 숙원대로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되었다.

후에 이승만은 대통령을 자임한 데 대한 의혹이 제기되자, 자신이 대통령으로 자임한 것이 아니라 미국 언론에서 먼저 자신을 대통령으로 호칭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성정부 소식이 미국 언론에 퍼지면서 자신을 대통령(president)으로 소개해 어쩔 수 없이 대통령이란 명칭을 썼다며 <뉴욕타임즈>(1919.7.13.) 기사를 실례로 들었다. 그런데 해당 기사는 물론이고 그 전후에도 이러한 기사는 게재되지 않았다.

이승만이 대통령을 자임하고, 상해 임시정부가 이를 승인한 것은 그가 한성정부 집정관총재로 추대되었기 때문이다. 한성정부 법통론의 핵심은 국내 13도 대표들이 대표대회를 개최(4월 20일)하여 각료를 정하고, 이를 국민대회(4월 23일)를 통해 공표했으므로, 여타 임시정부와는 달리 합법성과 정통성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성정부는 '총재=통령=president'의 체제가 아니었다. 총재는 이승만 한 명이 아니라 이동휘까지 2명이었고, 한성부는 2총재-8총장의 집단 지도 체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문제는 이승만 역시 이러한 점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승만은 5월 말에 한성정부 수립 문건을 접수하고, 자신이 집정관 총재이며, 이동휘가 국무총리 총재, 안창호가 노동국총판임을 알았다. 그러나 이승만은 먼저 대외적으로 자신이 대통령이라고 발표해서 이를 대내외적으로 공식화한 후 한 달이 지나서야 대통령이 집정관 총재이며, 이동휘는 국무총리, 안창호는 노동부총장이라는 개조된 내용을 발표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자신의 최고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위협할 수 있는 이동휘의 국무총리 총재 직명을 격하시킴으로써 1집정관 총재-9총장 체제 혹은 대통령-국무총리-장관의 수직적인 권력 체제를 강조하려 했다.

이승만은 국내에서 수립된 과도적 정치체제의 한성정부를 바탕으로 새로운 대통령제 정부를 창출했다. 나아가 이승만은 한성정부의 각료 직명을 부분적으로 개조하고 자신은 무소불위의 권한을 갖는 대통령으로 자임했다. 이는 이승만의 정치적 의도가 깔린 '개작(改作)'이자 엄밀히 말해 문서 변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이 통합 상해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되는 과정은 결국 몇몇 각료 직위 명칭의 자의적 개조를 통한 한성정부 체제의 변경(집단지도체제→단일지도체제), 한성정부 수립 의도의 변경(군주제·공화제의 과도 형태→대통령 중심제), 그리고 변경시킨 제도의 관철 과정이었다.

2) 이승만 대통령의 탄핵과 면직

앞서 본 바와 같이, 교과서는 이승만이 공산세력과의 갈등 때문에 대통령에서 탄핵·면직되었다고 하였다. 또 다른 곳에서는 "대립은 이승만의 동지회와 안창호의 국민회 사이에서도 일어났으며, 두 사람의 갈등은 1925년 이승만이 상하이임시정부 대통령에서 면직되는 사태로까지 발전하였다."(131쪽)라고 하여, 안창호와 갈등설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이승만을 대통령에서 면직시킨 사람이 아니라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공로자였다. 상해임정은 이승만의 요구-한성 정부의 존재 인정과 대통령 명의사용의 합법화-를 수용하여 임정을 개조함으로써 통합정부를 출범시켰다. 이 일에 앞장선 사람은 내무총장으로 국무총리 직무를 대행하고 있던 안창호였다. 안창호는 미주에서 이승만이 독자적인 활동 기반을 구축할 경우 상해임정의 위상이 약해지고 독립운동 진영이 분열할 것을 우려했다(고정휴, 73쪽).

이승만이 대통령으로서 신임을 잃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위임통치 청원이었다. 임시정부대통령인 이승만이 윌슨에게 국제연맹에 의한 위임통치를 청원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임시정부는 내부 분란 상태에 놓였다. 북경을 중심으로 한 신숙, 신채호 등 독립전쟁파는 군사통일주비회를 열고 이승만을 불신임하면서 임시정부 활동과 독립운동 전체의 방향 전환을 위한 국민대표회의를 열자고 주장하였다.

게다가 이승만은 임시대통령으로서 독립운동의 방략과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여 신망을 잃었다. 1920년 12월 초 상해에 도착한 이승만은 이달 28일에 열린 환영회에 참석하였다. 독립운동을 지도하는 임시대통령이 온 까닭에 환영회는 영웅을 대하듯이 하였으며 독립운동에 관한 정책 발표가 있으리라 보았다. 그러나 이승만은 첫 인사가 "미국에서 가져온 것이 금전이 아니고 소식뿐"이라고 하면서 자신이 독립협회 때부터 애국사업에 종사하였다는 선전과 대미외교가 가장 긴요하다는 말로 시간을 보냈다. 이승만이 독립운동이나 임시정부에 관한 정견을 조금도 보이지 않자 참석한 이들은 낙심천만하였다. 이승만은 독립 전쟁의 준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즉각적인 개전에 반대했다. 이승만은 준비 부족을 이유로 준비론을 주장했고, 독립전쟁론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내놨다. 나아가 이승만은 현실적인 조건을 고려 원동(遠東)과 미주의 역할분담론을 제기했다. 즉, 무장투쟁은 원동에서 준비하며 외교는 미주가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무장투쟁 준비는 원동에서 알아서 하라는 방관적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정병준, 119쪽).

이승만의 독선적인 태도 또한 문제였다. 이승만이 상해에 머무는 동안 임시대통령과 국무회의는 임시정부 운용에 관한 이견으로 점차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1921년 1월에 열린 제2차 국무회의에서 국무위원의 다수의사로, '임시대통령이 정부에 와서 정부를 주관하되 만일 정부에 오지 못할 때에는 행정의 결재권을 국무총리에게 위임하고 국무총리는 매월에 한 번씩 임시대통령에게 정무를 보고할 것'을 공결(公決)하였다. 그러나 임시대통령 이승만은 미국 워싱턴의 외교사업이 중요하여서 자기가 그곳을 떠날 수 없으며 행정의 결재권도 위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상을 그대로 유지하되 중요 사건은 반드시 워싱턴에 보내 자기의 재가를 받은 후에 실행할 것을 고집하였다.

제3차 국무회의에서는 국무총리제도를 변경하여 국무위원제도를 채용하고 국무위원회의 공결로 행정하자는 제안이 제출되었다. 과거 경험으로 보아 임시대통령이 미국에 앉아서 중국 상해에 있는 정부의 행정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거리의 관계로 의사를 통하지 못하여 재가를 받으려다가 실패한 일이 많았으니 이미 경험한 실패를 다시 하지 말자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대해 임시대통령 이승만은 '위원제는 한성정부의 정신이 아니므로 승낙할 수 없다'고 하면서 자기의 주장만을 고집했다. 그 결과 국무회의는 더 이어지지 못하고 폐회됐다.

마침내 1925년 임시의정원은 임시정부의 위신 실추, 재정 실책 등을 이유로 이승만 임시대통령의 불신임을 결의하였고, 그와 함께 이승만에게 수차례에 걸쳐 상해로 와서 정무를 볼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에 응하지 않자, 3월 23일 열린 의정원 회의에서 심판서의 주문(主文)대로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면직시키기로 결의하고 박은식을 새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승만이 통합정부의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된 지 5년 6개월만의 일이었다.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은 면직 사유를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1925.3.23).

"이승만은 외교를 가탁하고 직무지를 제멋대로 떠나 지금까지 5년에 먼 바다 한쪽 구석에 떨어져 있으면서 난국 수습과 대업 진행에 하등 성의를 다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허황된 사실을 함부로 만들어 퍼뜨려 정부의 위신을 손상하고 민심을 분산시킴은 물론이거니와, 정부의 행정을 저해하고, 국고 수입을 방해하고, 의정원의 신성을 모독하고, 공결(公決)을 부인하였으며, 심지어는 정부까지 부인하였다. 생각건대 정무를 총괄하는 국가 총책임자로서 정부의 행정과 재무를 방해하고, 임시헌법에 의하여 의정원의 선거를 받아 취임한 임시대통령이 자기의 지위에 불리한 결의라 하여 의정원의 결의를 부인하고, '한성조직의 계통' 운운함과 같은 것은 대한민국의 임시헌법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행위이다. 이와 같이 국정을 방해하고 국헌을 부인하는 자를 하루라도 국가원수의 직에 둠은 대업의 진행을 바라기 불능하고, 국법의 신성을 보존하기 어려울뿐더러, 순국 제현이 눈감지 못할 바이요, 살아 있는 충성스럽고 용감한 이들의 바라는 바가 아니므로 주문과 같이 심판한다."

<독립신문>에 적시된 임시정부의 이승만 대통령 탄핵·면직 사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직무지 무단 이탈이다. 이는 헌법의 규정 "대통령은 의정원의 승낙이 없이 국경을 마음대로 떠날 수 없다"(16조)를 어긴 것이 된다. 1920년 3월 임시의정원은 "정부의 수뇌자들이 한곳에 모여서 정책을 세우고 사업을 진전하여야 민중이 정부방침 아래서 일치행동을 취할 터인데 지금 임시대통령이 먼 곳에 있어서 정부 각원 등은 화합하지 못하였고 정무도 살피지 않는 까닭에 일에 장애와 착오가 중첩된다"며 임시대통령의 부임을 발의하였다. 이승만은 그해 12월 8일 상하이에 내항하였으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둘러싸고 국무위원들과 갈등이 증폭되어 이듬해 5월 20일 미주로 다시 돌아갔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후 재임(1919.9-1925.3) 6년 가운데 근무지 상해에는 6개월(1920.12-1921.5)밖에 거주하지 않았다.

둘째, 재정 수입 유용이다. 당시의 임시정부는 국내에서 송금 악화로 고전하던 재정의 상당 부분을 하와이 교포들의 세금 및 성금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이승만은 임정 대표 자격으로 구미위원부가 세금 징수 및 송금을 맡게 하고 징수되는 자금의 대부분을 임시대통령 외교 활동비로 충당하였다.

셋째, 임정의 결의를 부정하는 당파적 행동이다. 임시정부의 구미위원부 폐지 명령에 맞서, 이승만은 구미위원부가 한성정부 집정관 총재의 명령으로 조직되었다는 한성정부 법통론을 내세우며 오히려 임정의 불법성을 지적하는 등 정면으로 맞섰다.

임시의정원은 이승만이 임시대통령이면서도 미주에 머물면서 전혀 임정을 돌아보지 않았고, 미주동포들로부터 거두는 인구세 등의 세금을 임정에 보내지 않고 횡령하였으며, 임의로 구미위원부를 설치하는 등 임정의 정통성을 부정하였다는 점 등의 이유를 들어 그를 탄핵한 것이다. 당시 <독립신문>에 소공(笑公) 명의로 실린 글은 임시대통령 재직 시 이승만의 내정 실책으로서 일곱 가지를 지적했다. 첫째, 3.1운동 후 국외 민족운동세력들을 상해임정으로 통일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둘째, 대통령의 권한을 남용하여 구미위원부라는 위법적 기관을 설치했다. 셋째, 항상 정부의 소재지를 떠나 있었다. 넷째, 입법기관을 무시했다. 다섯째, 임시의정원으로부터 외국 공채의 발매권을 얻어놓고는 미주 교민에게 그것을 팔아 임의로 사용했다. 여섯째, 미주로부터 임정에 들어오는 재원을 막아버렸다. 일곱째, 군사에 대해서는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이승만에 대한 <독립신문>의 비판은 임시의정원의 판단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정휴, 238쪽).

이승만은 한성정부의 법통을 내세워 임정의 결정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구미위원부의 명맥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임시정부로 송금하는 것을 중단하고 한성정부의 법통을 들어 임시의정원 결의를 불법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결국 두 개의 임시정부를 주장하는 것으로 임정의 대외적인 공신력을 손상시켰다. 구미위원부 해체 명령과 대통령직 탄핵·면직 이후 이승만과 임시정부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이승만과 임시정부의 관계 복구는 1933년에 가서야 시도될 수 있었다. 그리고 1940년대 초반 이승만이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에 선임됨으로써 임시정부와 공식적 연계를 재개할 수 있었다. 주미외교위원부는 단순히 임정과 관계를 회복시킨 차원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이승만이 해방 직후 임정의 명의를 활용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 것이었다. 이승만은 공식 직함이 임정 외교부 산하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임에도 불구하고, 한성정부 법통을 내세우며 해방 때까지 여전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표(President)로 행세하였다

CIA "이승만, 나라 장악 위해 독립에 생애 바쳐"

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이승만이 정권을 장악한 후 CIA는 이렇게 평가했다. "이승만은 개인적으로 나라를 장악할 궁극적인 목적으로 한국의 독립에 전 생애를 바쳤다. 이 목적을 추구하면서 그는 자신의 개인적 출세를 위해 기꺼이 이용할 수 있었던 요소들을 이용하는 데 주저치 않았다."(정병준, 696쪽). 이승만은 민족 독립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적인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으며, 자신의 출세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승만은 하와이 한인사회의 재정과 조직을 장악하기 위해 옥중동지이자 하와이 초청 당사자인 박용만을 대상으로 벌인 재판과 폭력사태 등 이른바 '하와이 풍파'를 일으켜 한인 사회를 분열시켰다. 또 제헌헌법(101조)에 민족반역자 처벌과 그에 의거한 반민법 규정이 엄연히 있는데도 반민특위를 해체하여 민족적 과제인 친일파청산을 좌절시켰다. 이후 김구 암살 배후 혐의를 받았으며 조봉암 사법살인 등으로 독립운동가를 탄압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비추어 볼 때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권력 장악을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는 미국 정보부의 평가가 설득력 있게 들린다.

참고한 글
임종국, 「제1공화국과 친일세력」, 『해방전후사의 인식』 2, 한길사, 1985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1
고정휴, 『이승만과 한국독립운동』, 연세대 출판부, 2004
정병준, 『우남 이승만연구』, 역사비평사, 2005
김삼웅, 『 '독부' 이승만 평전』, 책보세, 2012

-출처 뉴라이트 교과서는 이승만 위인전인가? : http://bit.ly/11win1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