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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주말나들이] 전주한옥마을, 풍남문 그리고 전동성당

[주말나들이] 전주한옥마을, 풍남문 그리고 전동성당

부산에서 전주는 너무나 멀다. 쉽게 갈수 있는곳은 아니다. 기차나 버스편도 그다지 마땅치 않기에 자동차로 이동해야 하고 그 시간도 만만치가 않다. 
그렇다고 전혀 가보지 않은곳은 아니다. 몇번이나 가보았지만, 가본곳은 약국, 결혼식장, 그리고 마누라의 큰아버님댁이 전부였다. 
전주한옥마을, 경기전 그리고 비빔밥등은 전혀 구경해보지도 못했고 시간에 쫓기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끌려다니며 운전만 했을뿐이였다. 
하지만 이번엔 약간의 시간을 내어 짧은 관광을 했다. 어쩌면 딸아이에게 좀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생겼나 보다. 실제 관광이 목적이 아니고 집안의 어르신께서 병원에 입원하였기에 부산에서 전주로 향했을 뿐이니까?



아침, 저녁으로로 완연한 가을의 시원한 바람이 불지만, 아직 한낯에는 햇볕이 재법 따가웠다. 우리 일행은 전주 한옥마을로 향했다. 
한국의 멋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한옥 그리고 그 한옥으로 마을을 만들고 관광객을 유치한 전주한옥마을 도시의 번잡함에서 한적한 한옥마을을 생각하며 우리는 향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모습은 아니였다.
날씨는 더웠고, 사람들은 겁나게 많았으며 마을잔치가 있는지 각양각색의 음식들을 팔고 있었다. 
한적한 한옥마을이 아니라 시장이 떠오른다. 수많은 음식냄새, 그리고 음식을 처리하지 못하고 길가에 버려져 있는 음식물 쓰레기들 전주의 깨끗한 이미지가 한순간에 날아가는 순간이다.

그리고 우리가 향한곳은 풍남문 전주성의 성문중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성문으로 갑오농민전쟁의 현장이며 고부농민봉기때 농민군들이 전주성으로 입성할때 이 성문 풍남문으로 들어 왔다고 한다. 그시절 네트워크가 발달하지 않았을때 일반 하층민들이 어떻게 봉기를 했을까? 아마 우리가 상상하기 힘들정도의 핍박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네트워크가 발전하여 대한민국의 반대편에서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공감을 해도 얌전히 있는 사람이 많은데 그 시절에 어떻게 그렇게 전국적으로 봉기 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시절 우리 조상들이 지금보다 더 근대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풍남문 성문에서 농민군이 입성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잠시 가만이 서있어 보는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리고 맞은편엔 아주 멋진 건물이 보인다. 풍남문의 모습이 머리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전혀 다른 멋을 풍기는 건물이 보인다. 그건 전동성당이다. 꼭 깊은 숲속에서 세상을 관조하며 걱정하는 수도사들이 기거할 것 같은 모습의 성당 아마 헤르만헤세의 '지와 사랑'에 나오는 골드문트가 저런 건물에서 평생 공부를 하지 않았을까? 
프랑스 신부가 성당부지를 매입하고 또 다른 신부가 설계를 한 전동성당은 호남지방에서 서양식 근대 건축물 중에서 규마가 가장크고 오래되었다고 한다. 1988년 화재로 건물 일부가 소실되었지만 그 존재감은 여전할 것 같다.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 나의 길을 비추는 빛이오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성당은 결혼식때문에 몇번을 간적은 있지만 그땐 자세히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전동성당의 내부는 보고 싶지 않았도 내눈은 한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높이 솟은 지붕 저 멀리 몰입되는 시선이 나도 모르게 무거운 마음의 짐을 내려 놓는듯 했다. 그 무거운 짐은 성당을 나가면서 바로 눈앞에 나타났지만 그 짧은 시간동안 아주 마음을 가볍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인사를 한번 더하고 나오게 되었다.


성당주변의 건물들 저런건축 양식을 무어라고 말하는지 모르지만 묵직한 느낌으로 인해 마음을 가볍게 하는 듯 했다.

전주한옥마을은 다음에 한적한 시기에 사람이 별로 없을 때 다시 한번 찾아가 보아야 겠다. 
그리고 풍남문과 전동성당 그리고 전주 비빔밥은 짧은 전주여행을 오래 기억남게 만들어준 고마운 추억이 되었다.